“오직 성경”, “첫째 성경”, “모든 성경”

남 대 극 / 전 삼육대학교 총장

 


현대진리와 남은자손의 기별

조지 나이트 / 앤드류스대학 명예교수 George R. Knight  / Professor Emeritus of Church History, Andrews University

 

 

2018 년 11월 기도인 연합회보 특별 기고  

“오직 성경”, “첫째 성경”, “모든 성경”

(Sola Scriptura, Prima Scriptura, Tota Scriptura)

남 대 극 / 전 삼육대학교 총장

♣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성경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 연구자 또는 일반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원칙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원칙이다. 이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 특히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표방한 원칙으로서,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의 수립과 적용, 그리고 그리스도인 삶에 있어서 오직 성경만이 기준이 되어야 하며, 그 밖의 문서나 발표나 결정은 어떤 것이든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다. 루터가 “오직 성경”을 외친 것은 당시의 교회인 가톨릭교회가 교황의 권위를 성경보다 우위에 두면서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 교리들을 만들어 내는 데 대한 반작용이었다.

“오직 성경”은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한 “5대 원칙” 즉 “5대 오직”(Five Solae) 중의 하나이다. “5대 오직”이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다.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의 내면에는 ‘그리스도교 정경(正經, Canon)만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며, 따라서 유일한 무오(無誤)의 문서이다.’라는 사상과 ‘성경에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신념,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믿음과 ‘그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모든 면으로 충분한 효력과 능력과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신조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각종 문서들, 예를 들면, 외경(外經)과 위경(僞經), 교부들의 글, 교회의 전승, 종교회의 또는 교단의 결의문, 교황의 칙서 또는 교서,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 종교개혁자나 신학자의 성경 주석, 등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하는 부차적인 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글들이 효력을 가지려면 그 자체가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되어야 하고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복음주의 교단들과 침례교회는 “오직 성경”을 더욱 강조하여, 성경은 “자체적으로 권위를 입중하고”(self-authenticating), “합리적인 독자에게는 명료하며”(clear [perspicuous] to the rational reader), “그 자체의 해석자”(its own interpreter [“Scripture interprets Scripture”])이고, “그 자체로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최종적인 권위가 되기에 충분하다”(sufficient of itself to be the final authority of Christian doctrine)고 주장한다.

엘렌 G. 화잇(Ellen G. White) 여사도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단의 공격 방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에도 16세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일을 반대하고 있다. 오늘날은 개혁자들의 교훈과 모본에서 멀리 떠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았던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원칙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각 시대의 대쟁투, 204, 강조 첨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성경, 오직 성경만을 모든 교리의 기준과 온갖 개혁의 기초로 삼아 지지하는 백성을 가지실 것이다. 학자들의 의견, 과학의 이론, 종교회의에서 정한 신조나 결정은 사람들이 대표하는 교회와 다수의 의견에 따라 다양하고 일치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종교적 신앙에 관하여 그 찬부를 결정할 때는 위에 열거한 것들의 전부나 그 하나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교리나 교훈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이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하는 분명한 말씀에 일치되는지 확인해야 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595, 강조 첨가).

“목사들의 야망은 오직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하나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급적 많이 아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목사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욱 밝히 식별하면 할수록, 주님의 정신을 더욱 충실히 본받으면 받을수록,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는 단순한 진리를 더욱. 강력하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복음전도, 181; RH, 1896. 3. 24, 강조 첨가).

화잇 여사는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에 대하여 확고하고도 철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며,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로 개혁자들의 원칙인 “오직 성경”을 어느 저술가보다도 더 강조하였다. 그녀가 비록 수많은 계시를 받았고 수십 권의 영감된 서적을 저술했지만 자신이 기록한 문서들을 성경 위에 두거나 자신의 글이 성경을 대치한다는 주장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고 그런 암시조차 한 적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저술들에서 “오직 성경”이라는 표현을 30회 이상 사용하였고, “오직 그리스도”를 약 120회, “오직 예수”를 약 40회 사용하였다. 그녀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의 노선을 철저히 따른 사람이었으며,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취지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오랫동안 진리로 여겨져 오고 있다 할지라도 어떤 인간의 사상에 들어맞도록 성경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석가들의 견해를 하나님의 목소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우리처럼 실수하는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는 물론 우리에게도 추리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그 자체의 해석자로 삼아야 한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106, 강조 첨가).

♣ “첫째 성경”(Prima Scriptura)

성경을 대하는 두 번째 태도는 “첫째 성경”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두 가지 개념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 하나는 “성경을 첫째로” 또는 “성경을 최우선으로”라는 태도이다. 이것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든다는 의미에서 “오직 성경”과 거의 같은 사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성경을 첫째로” 하고, 이어서 둘째와 셋째로 다른 것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로 이해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권위를 절대적 우위에 두지 않고 상대적으로만 우위에 두는 듯한 뉘앙스가 들어 있는 표현이다.

실제로 영국국교(Anglicanism, 성공회)와 감리교(Methodism)는 성경을 우위에 두기는 하지만 다른 요소들도 그에 준하는 기준으로 인정하고 있다. 영국국교는 그 교회 학자인 리처드 후커(Richard Hooker)가 말한바 “영국국교의 3요소”(“Anglican triad”) 또는 “삼족(三足) 도구”(“three-legged tool”)로 성경(Scripture)과 전승(tradition)과 이성(reason)을 꼽고 있고, 감리교는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주장을 따라서 이 세 가지, 즉 성경, 전승, 이성에다 경험(experience)을 더하여 네 가지 요소를 교리와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 네 요소를 흔히 “웨슬리의 4각형”(“Wesleyan Quadrilateral”)이라 일컫는다.

한편, 재림교회는 성경을 최우선으로 최우위에 둔다는 의미에서 “첫째 성경”(prima Scriptura)이라는 사상에 공감하지만, 영국국교의 “3요소”나 감리교의 “4각형”과 같은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첫째 성경”이라는 원칙에 동조하지 않는다. 인간의 전승(傳承, 유전)에는 많은 허위와 오류가 포함되어 있고, 인간의 이성(理性)에는 개인차와 편견이 들어 있으며, 특히 인간의 경험(經驗)은 주관적이고 부정확하여 그리스도교 일반의 신앙과 실천의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 화잇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들의 유일한 신경(信經)이 되고 연합의 유일한 증서(證書)이다. 거룩한 말씀에 굴복하는 자들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견해와 사상이 우리들의 노력을 지배하여서는 안 된다. 인간은 오류에 빠지기 쉬우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가려 뽑은 기별, 1권, 416; RH, 1885. 12. 15, 강조 첨가).

“하나님께서는 부흥과 개혁을 요구하신다. 성경 말씀, 오직 성경만을 설교단에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능력을 박탈당해 왔고, 그 결과, 영적 생활의 격조가 저하(低下)되었다. …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말하게 하라. 유전[전승]과 인간의 이론과 금언만을 들어 온 자들로 하여금 영혼을 새롭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라.”(선지자와 왕, 626, 강조 첨가).

♣ “모든 성경”(Tota Scriptura)

“모든 성경”은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과 병행하여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의 각 부분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믿는 것이다. “모든 성경(πᾶσα γραφή, all Scripture)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딤후 3:16)이므로, 성경의 어느 부분이든지 영감되지 않았거나 다른 부분보다 덜 영감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어떤 학자들을 “성경의 완전 영감설”(Theory of the plenary inspiration of Scripture)이라고 일컫는다. 성경이 통째로 또는 전체가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학설이다.

이러한 신학에 의하면, 성경의 어느 부분도 불필요하게 여겨서는 안 되고, 정경 66권 중에서 어느 부분이라도 빼거나 거기에 다른 것을 더해서는 안 되며(참고 계 22:18-19),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더 진리이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전체로(wholly, entirely) 받아들여야 하지, 여기저기에 가위질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신약을 읽을 때, 빨간색으로 인쇄된 부분(예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한 것을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거룩하거나 더 영감된 것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어느 부분이 더 영감되었다고 하거나 어느 것이 더 진리라고 말하면, 그 기준은 극히 주관적이고 인위적이다. 사람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이나 어느 책을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할 수는 있지만 자기가 더 좋아하는 부분을 더 영감되었다거나 더 확실한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근한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신다거나(참고 레 18:25; 시 149:7; 사 26:21; 고후 10:6) 심판하신다는(참고 창 18:25; 대상 16:33; 시 9:8; 11:4; 마 12:36; 히 9:27; 계 20:12-13) 구절들은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경시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닐 뿐더러 그런 자세와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내놓는 가르침들은 이설 또는 이단으로 낙착되기 마련이다. 자기의 마음에 드는 구절들만을 엮어서 세운 이론들은 곧 무너지고 만다.

물론, 성경에는 더 중요한 부분과 덜 중요한 부분이 있다. 어떤 본문은 매우 자주 인용되거나 암송되지만 어떤 본문은 거의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의 중요성의 차이가 영감성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몸에 각기 다른 지체들이 있고, 그것들의 중요성과 유용성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지만, 온전한 신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그 중의 어느 것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도 흡사하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덜 중요할지라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서는 다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제3차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행한 고별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모든 성경”의 원칙을 따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둡니다. 앞으로 여러분 가운데 누가 어떤 심판을 받게 되든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뜻, 계획]을 여러분에게 남김없이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행 20:26-27, 「현대어성경」, 강조 첨가). 달리 표현하면, 바울은 “모든 성경”(tota Scriptura)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설교하였다.

재림교회는 그 역사의 초기부터 “오직 성경”과 “모든 성경”의 원칙을 지켜 왔다. “첫째 성경”이라는 원칙은 오해의 소지가 있고, 영국국교와 감리교가 표방하는 그 주장은 성경의 권위를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우리는 찬성할 수가 없다.

♣ “예언의 신”(The Spirit of Prophecy)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이 대두될 수 있다. 엘렌 G. 화잇은 “오직 성경”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그녀의 글을 읽고 인용하는 우리로서는 그녀가 저술한 책들을 어느 위치에다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남긴 영감의 저술인 “예언의 신”을 성경과 비교할 때 그것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확실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재림교회는 화잇 여사에게 영적으로 크나큰 빚을 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화잇 여사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 때문에 안팎으로 많은 공격과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재림교인들은 “예언의 신”의 서적들을 너무나 귀중히 여기는 나머지, 그 안에 담긴 증언들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어떤 때는 문자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성경보다 더 구체적인 경우가 허다하므로 성경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우대함으로써 바깥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마치 화잇 여사를 우상시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재림교인들이 “예언의 신”의 권면을 높이고 존중히 여기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그런 일로 인하여 재림교회를 마치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 원칙에서 벗어난 ‘이단 교회’로 낙인찍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재림교회는 철두철미 “오직 성경”의 원칙을 지키는 교회이며, 화잇 여사도 “오직 성경”을 누누이 강조하였으므로, “예언의 신”을 성경의 지위나 권위보다 더 위에 두는 것은 아무도 옳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화잇 여사 자신도 자신의 글을 “보다 작은 빛”(“a lesser light”)으로 칭하면서 그것이 “보다 큰 빛”(“the greater light”)인 성경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고 말하였다. “남녀들이 성경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는 보다 작은 빛을 주셔서 보다 큰 빛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다.”(문서전도봉사, 125, 강조 첨가).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통하여 “예언의 신”이 주어진 까닭은 사람들이 성경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말씀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이 경계에 경계를, 교훈에 교훈을 더하시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증언들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대들 가운데 많지 않다. 그대들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한다. 만일 그대들이 성경의 표준에 도달하고 그리스도인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을 것 같으면, 그대들에게는 증언들[“예언의 신”]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단순하고 직접적인 증언들을 통하여 그대들이 터득하도록 노력하시고, 그대들이 순종하기를 등한히 해 온 영감의 말씀[성경]에 그대들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하시고, 그대들의 생애를 그 순결하고 고상한 교훈과 일치되게 하도록 권유하신 것은 그대들이 하나님의 영감의 책[성경]에 정통하기를 등한히 해 왔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주신바 증언들[“예언의 신”]을 통하여 그대들을 경고하고, 책망하고, 권고하시며, 또한 그분의 말씀[성경]의 진리를 그대들의 마음에 새겨주고자 하신다. 기록된 증언들[“예언의 신”]은 새 빛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미 계시된 영감[성경]의 진리를 마음에 생생하게 새겨주기 위해서 주어진다.”(교회증언, 5권, 665 강조 첨가).

그러므로 비록 “예언의 신”이 성경과 동일한 근원, 즉 같은 성령의 역사로 주어진 선물이라 할지라도 결코 성경을 대신하거나 성경 위에 군림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말로만 아니라 실행으로 보여주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재림교회가 “예언의 신”을 성경보다 더 위에 둔다는 부당한 비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잇 여사를 통하여 전해진 권면들과 기별들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귀하고 요긴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교회를 이단으로 내모는 이유로 작용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교인들의 그릇된 처신 때문이지, 그 서적 자체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이라는 신학의 기치(旗幟)를 더 높이 치켜들어야 한다. 아무에게나 “예언의 신”을 펴서 들이대는 것은 지혜롭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는 일이다. 우리는 “예언의 신”을 좀 더 많이 읽고 더 깊이 연구하여 우리의 실생활에 더 잘 적용할 필요가 있는 동시에, 그로 인한 불필요한 오해를 유발시키지 않도록 슬기롭게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철두철미 “오직 성경”의 백성이며, 화잇 여사가 그토록 많은 저술을 남긴 것도 우리가 더욱 더 “오직 성경”의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재림기도인연합 국제포럼 2014에 부치는 글 (I) 

현대진리와 남은자손의 기별

조지 나이트 / 앤드류스대학 명예교수 

현대진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이 벧후1:12절에서 찾은 개념이다.  밀러주의자들은 그 단어를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언급할때 사용했다. 조셉 베이츠 (제임스와 엘렌 화이트와 함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 교회의 창시자) 는 1847년 1월 처음으로 제칠일 안식일에 적용하였다. 각 다른 시기에 그는 현대진리의 개념을 넓혀 요한계시록 14장의 셋째 천사의 기별을 모두 포함시켰다.  현대진리는 1844년 10월 이후 발견된 안식일 진리, 성소진리, 그리고 이와 관련된 개념들이었다. 

1849 년 제임스 화이트는“이미 있는 진리에 서는것”을 말하는 베드로후서1:12절을 인용한 후 “베드로가 살던 시대에 현대진리, 당시에 적용된 진리가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그 시대에 적용되는 현대진리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현대진리는 환난의 시기를 앞둔 우리들의 현재의 의무와 바른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현대진리의 내용에 관해 베이츠와 전적으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 계시록 14장의 첫째와 둘째 천사의 경고는 발하여졌다.  이제  셋째 천사의 음성이 들려져야 할 때이다.

제임스 화이트가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의 첫 정기간행물 이름을 현대진리라 한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베이츠와 함께, 예수님의 재림 전 하나님의 마지막 날 현대진리를 온 세상에 전할 마지막 시대의 특별한 백성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을 믿었다. 현대진리의 핵심은 계시록 14:6-12절의 세 천사의 기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그 진리의 핵심을 잘못된 운동들 (계 18:1-4) 로부터 불려내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계 14:12) 무리들과 함께 하나님의 최후의 날에 남은자들 가운데 전해질 하나님의 마지막 남은 자손의 기별로 보게 되었다.

예수님의 재림(계 14:14-20)은 세천사의 기별 바로 후에 있다. 화잇 부인이 반복적으로 세천사의 기별을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자비의 기별로 언급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초기 재림신자들은 남은 자손 기별의 핵심 사항으로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할 필요에 촛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1880년대 후반에 엘렌 화이트, 알론조 T. 존스, 그리고 엘렛 J. 와그너는 계시록 14:12절의 "예수의 믿음"에 촛점을 두고 예수안의 믿음을 갖는것에 현대진리의 참 핵심사항으로 중점을 두게 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로 얻는 구원이 중심이 되었다. 안식일 지키는 것과 그외 다른 문제들은 이미 예수님과의 구원의 관계를 이룬 사람들의 믿음의 결과의  한 부분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 남은자손의 기별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 (계 14:12)을 모두 포함하게 되었다. 그 기별은 예수님이 하늘 구름가운데 나타나실(계 14:20) 때까지 외쳐져야 할 것이었다. 

현대 재림기별에 존재하는 큰 유혹들 중 하나는 역사속에서 그 기별이 차지할 자리를 잊고,  계시록14장의 현대진리를 잊고, 나아갈 길을 잃는 것이다. 이번 재림성도들에게 현대진리를 다시 알릴 재림기도인연합 국제포럼 2014이 한국에서 개최됨을 감사드린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전파되어야 할 이 특별한 기별을 잊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마귀는 교회가 곁길로 빠지도록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칠일 안식일 진리가 지구 역사의 마지막 장에 들어서는 이때 기도와 신실한 믿음은 반드시 같이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Present Truth” is a concept that the pioneers of 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picked up from 2 Peter 1:12. The Millerites had employed it to refer to the imminent return of Jesus.1 Joseph Bates (founder of 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along with James and Ellen White) applied it to the seventh-day Sabbath as early as January 1847.2 At other times he expanded the concept to include the entire third angel’s message of Revelation 14.3 Present truth was the Sabbath, the sanctuary, and related concepts that the Sabbath-keeping Adventists had discovered since October 1844.

  James White in 1849, after quoting 2 Peter 1:12, which speaks of being “established in the PRESENT TRUTH,” wrote that “in Peter’s time there was present truth, or truth applicable to that present time. The Church [has] ever had a present truth. The present truth now, is that which shows present duty, and the right position for us who are about to witness the time of trouble.”4 He definitely agreed with Bates on the content of present truth. The first two angels of Revelation 14 had sounded. Now it was time for the third.5

  It was no accident that James White named the first Seventh-day Adventist periodical Present Truth. He, along with his wife and Bates, came to believe that God had raised up a special people at the end of time to present God’s last-day present truth to all the world before the coming of Jesus. The core of that present truth centered on the three angel’s messages of Revelation 14:6-12. They came to see that as God’s last “remnant” message to that part of God’s last day remnant that still needed to be called out of false movements (Rev. 18:1-4) and into fellowship with those who keep “the commandments of God, and the faith of Jesus” (Rev. 14:12).

  Immediately after the three angels’ messages is the second coming of Jesus (Rev. 14:14-20). It was no accident that Ellen White repeatedly referred to the third angel’s message as God’s last message of mercy to the world. The earliest Adventists focused on the need to keep the seventh-day Sabbath as the heart of the remnant message. But by the late 1880s Ellen White, Alonzo T. Jones, and Ellet J. Waggoner, were focusing on “the faith of Jesus” part of Revelation 14:12 and had begun to put forth saving faith in Jesus as the true heart of present truth.6

  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 had become central. Keeping the Sabbath and other issues were viewed as a part of the faith response of those who already had a saving relationship with Jesus. Thus the last day remnant message included both the commandments of God and faith in Jesus (Rev. 14:12). That message was to be proclaimed right up to the time that Jesus appears in the clouds of heaven (Rev. 14:20).

  One of the great temptations of modern Adventism is that it will forget its place in history, will forget the present truth of Revelation 14, and will lose its way.7 I am grateful that the Adventist Prayer Forum 2014 will be held in Korea, reminding Adventists of the present truth. We need to pray on a regular basis that Adventism will not forget the special message that needs to be preached to all the world (Rev. 14:6) before Jesus comes. The devil will do all he can to sidetrack the church. As a result, prayer and faithfulness must go hand in hand as the Seventh-day Adventism moves into the final days of earth’s history.

Notes

  1. Midnight Cry, Aug. 24, 1843, p. 8.

  2. Joseph Bates, The Seventh Day Sabbath, a Perpetual Sign, 2d ed. (New Bedford, Mass.: Benjamin Lindsey, 1847), p. iii.

  3. Joseph Bates, A Seal of the Living God (New Bedford, Mass.: Benjamin Lindsey, 1849), p. 17.

  4. Present Truth, July 1849, p. 1.

  5. Ibid.

  6. Ellen G. White, Manuscript 8a, 1888.

  7. See George R. Knight, The Apocalyptic Vision and the Neutering of Adventism, rev. ed.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2009). 


참 진리를 찾는 포럼을 위한 기도  

존 폴린 / 로마린다 대학 종교대학 학장 Jonathan Paulien  / Dean, School of Religion, Loma Linda University  

 

재림기도인연합 국제포럼2014에 부치는 글 (II)  

 참 진리를 찾는 포럼을 위한 기도

 존 폴린 / 로마린다 대학 종교대학 학장

제칠일 안식일 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역사를 우리의 시간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아주 가치있게 생각합니다 (각시대의 대쟁투의 중요한 주제임). 우리는 과거에 헛되이 잃어버린 많은 신앙운동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신앙의 바른 여정에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많은 신앙운동들의 실패했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느낍니다. 하지만 자칫 이것이 우리의 잘못된 자신감은 아닌지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적용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인지요?

초기교회 역사를 보면 신앙에 어떤 변질의 패턴을 볼수 있습니다. 4세기까지, 초기 기독교는  여러가지 교리적 손실을 겪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역사학자 재임스 D.G Dunn ( The Partings of the Ways, 243~258)이 주목한바와 같이, 기독교의 교리적 손실은 유대신앙과 기독신앙 사이의 상호 적대감에 의해 촉진되었습니다. 이러한 적대감 때문에, 양쪽이 처음에 공유했던 같은 견해에서 서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두 종교는 각자의 “정통신앙”으로 발전해 가면서, 서로에게 반대되는신앙적 견해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신앙의 정체성의 중심은 아주 서로 다르게 정의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자신들이 유대주의와 다르다고 증명해할 이유밖에는 안식일을 포기할 심각한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유대주의는 메시아에 대한 주제를 경시해야할 이유가 다른 사람들이 유대주의를 기독교와 혼동할지 모른다는 이유밖에는 없었습니다. 메시야는 기독 신앙의 가장 중심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두 종교가 갈라질때, 둘 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갈라질때, 정통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을 포기했을뿐 아니라, 구약에 대한 일반적 무지와 신약의 제한적 사용을 조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럼므로, 오늘날 기독교는 더 이상 과거의 기독교도 아니고, 더 낫게 될수 있을 뻔 했던 기독교도 아닙니다. 유대주의와 맞대하여 자체의 정체성을 발전해 가는데, 기독교는 초기 기독신앙이 가지고 있었던 건강한 신앙 유산의 한 구성요소로 부터 스스로 담을 쌓았습니다. 3세기부터 6세기 까지의 기독교는 그전과 같은 기독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개혁을 위해 숙성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숙고해 보겠습니다. 종교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변질해갈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자유적인” 방식으로 기울어져 갈수 있다는 생각을 익숙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역사적 신앙의 여러가지 측면을 점점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미묘한 형태의 “변질”도 있습니다. 그것은 더 “보수적인” 종류로 “흑백논리” 적 사고방식의 형태입니다. 우리는자신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건강한 상호교통으로 부터 벽을 쌓아가며 스스로를 더욱 더 엄밀하고 정확하게 규정 짖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현실과 더욱 멀어지고 더 편협한 믿음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형태의 변질은 다른 형태보다 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신앙이 보기엔 더 신실하고 옳아보이기 때문입니다. 재림주의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경우를 1988년에 일어난  와그너와 존스에 대한 대항에서 명확하게 볼수 있었습니다.

종교가 쇠퇴해가는 경향성은 엔트로피 (균질성)와 같이 자연스런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때 가장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인 “부흥과 개혁”의 필요가 있게됩니다. 하지만 더 보수적인 형태의 변질에서는, “부흥과 개혁” 그 자체가 더 편협하고 완고해져서 거꾸로 변화하려는 시도자체를 더 어렵게되도록 뒤틀어 질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안에 있는 이런 저런 구룹을 치려고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저의 주요 관심은 “자유주의적”이거나 “보수주의적”인 쇠퇴나 “변질”은 우리가 숨쉬는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그저하는 기도가 아니라 특별한 종류의 기도, 즉 자신을 신뢰하지 않음에 근거한 기도가 중요합니다. 

예레미아 17장 9절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묘사한 문제는 자기기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기만적입니다. 나의 마음도 기만적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너무 기만적이어서 얼마나 우리가 기만을 당하고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지나치리만큼 사악하고 기만적이라면,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을 기도의 제단에 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과 개혁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자신의 의견까지 포함한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을 때에만 올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 2장 14 절에 말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닿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로 나온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의 생명과 가족과 친구와 명성을 댓가로 치르게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얼마나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십니까?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진리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받게될것입니다. 기꺼이 배우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도 기꺼이 진리가 찿아지도록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참석하는 포럼에서 진리- 이 마지막 때의 현대진리를 찿으셔서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을 그러한 기도에로 초대합니다.   

As Seventh-day Adventists, we value the importance of history as a way to understand God’s purpose for our own time (note the central theme of the Book The Great Controversy). We compare ourselves with past movements that lost their way and are comforted that we are still on course. It is comforting to think that we will not repeat the mistakes of history. But I wonder if our confidence is not sometimes misplaced. Are we are as ready to apply the lessons of history to our own frailties and shortcomings as we are to those of others?

            When we look at early church history, we notice a pattern of apostasy. By the fourth century, early Christianity had suffered a number of doctrinal losses. As noted by historian James D. G. Dunn (The Partings of the Ways, 243-258), these losses were to a large degree precipitated by an increasing and mutual hostility between Judaism and Christianity. Due to that hostility, both sides pulled back from positions that the two sides had held in common at the beginning. As both religions developed respective “orthodoxies,” positions hardened against each other. The core of each faith’s identity was defined as distinct from the other.

             Christianity, for example, had no serious reason to give up the Sabbath, except to demonstrate that it was distinct from Judaism. Judaism had no reason to downplay the subject of the Messiah, except that others might confuse Judaism with Christianity, which made the Messiah a central part of its confession of faith. When religions split apart, both tend to lost something. After the breakup with Judaism the resulting Christian orthodoxy not only gave up the Sabbath, it has fostered within Christianity a general ignorance of the Old Testament and a very narrow and selective use of the New. Christianity today, therefore, is not what it once was or what it could have been. In developing its identity over against Judaism, it walled itself off from elements of its own heritage that were a healthy component at an earlier period. The Christianity of the third through the sixth centuries was not what it once was. It was ripe for some sort of reformation.

             Let me reflect a bit further on the above. Religions can decline in more than one way. We are accustomed to the idea of "liberal" decline. People over time take various aspects of a historic faith less and less seriously. But there is a more subtle form of "apostasy." It is the "conservative" type, the more "black and white" mentality. We define ourselves more and more exactly, in the process walling ourselves off from healthy interaction with those who disagree. We end up hardening in a more narrow faith that over time becomes less and less in touch with reality. In a way, this type of apostasy is more dangerous than the other because it seems so faithful and right. Within Adventism, it was clearly witnessed in the opposition to Waggoner and Jones in 1888.

            The trend toward religious decline is a natural one, like entropy. It is most dangerous when no one notices. Thus there is a continual need for “revival and reformation.” But in the more conservative type of decline, “revival and reformation” can be twisted into a further narrowing and hardening, exacerbating the very process it attempts to reverse. I mean here no slap against one group or another in the church today. My primary concern is to note that whether one is “liberal” or “conservative” religious decline or “apostasy” is as natural as breathing. Hence the critical importance of prayer, and not just prayer but a special kind of prayer, one that is grounded in self-distrust.

           Jeremiah 17:9 tells us,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beyond cure. Who can understand it?” (Jer 17:9) The problem described here is self-deception. Your heart is deceitful. My heart is deceitful. In fact, our hearts are so deceitful we don’t even realize how much we are deceived. If human hearts are exceedingly wicked and deceptive, then we need to lay our pre-conceived opinions, our prejudices, at the altar when we pray. Genuine revival and reformation only comes when self is laid aside, including the opinions that we cherish more than anything. As Paul said in 1 Corinthians 2: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True knowledge of God comes from a willingness to receive the truth from God no matter what it costs. Knowledge of God can cost you your life, your family, your friends, and your reputation. So how badly do you really want to know God? If you want the truth no matter what the cost, you will receive it. God is willing for you to find the truth if you are willing to be taught.  I wish that the forum you are attending today help you find the truth—the present truth in this end time, leading you to want to know God more.  Today I invite you to pray that kind of prayer.


PRAYING WITH A PARTNER

by Barry Black / Chaplain of the United States Senate

I congratulate you for your interest in prayer and would like to suggest a way to energize your prayer life:  pray with a partner.  We should pray patiently and fearlessly with purity, effectiveness, perseverance, intimacy, fervency, and submission, but also with a partner.  Praying with a partner will bring fresh power to your prayers, energizing your intercession.

       Jesus talked about the exceptional power this strategy can bring.  He said (Matthew 18:19, 20): “I also tell you this: If two of you agree here on earth concerning anything you ask, my Father in heaven will do it for you.” What does this amazing promise mean? It obviously does not mean that no matter what we pray with a partner we will receive our request. We know (Mark 10) of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coming to Jesus in agreement. They asked Jesus to permit them to sit on the right and the left of His throne in a kingdom that would never exist. Jesus responded, “You don’t know for what you are asking.’ If Matthew 18:19 is to be taken literally and without qualification, we would have to ignore the fact that on many occasions two people have agreed to pray and their prayer has not in the literal sense been answered. What Jesus is saying is that when we pray with a partner we must desire the answer which God, in His wisdom and love, knows is best.

       Imagine what would have happened if God had said “yes” to Joseph’s prayers in Genesis 37.   No doubt Joseph prayed that God would permit him to go back home after his brothers threw him in the pit. God instead permitted Joseph to go to Egypt as a slave, sold by his brothers to a band of foreigners. Joseph would later comment (Genesis 50:20): “You intended to harm me, but God intended it all for good. He brought me to this position so I could save the lives of many people.” So praying with a partner positions us to experience God’s greater wisdom and love choreographing our destinies with His loving providence.

Another reason why we should pray with a partner is to protect our prayers from selfishness, as Jesus taught us to pray in “The Our Father,” where we repeatedly encounter plural pronouns. This prayer is about us, not about an individual. Praying with a partner leads us down an unselfish path, helping to purge our prayers from self-centeredness.

We should also pray with a partner because Jesus is as much present with two people as He is with a very large congregation. In other words, you do not need an entire church praying for you to pray with power, making your voice heard in heaven. Christ, the greatest intercessor, joins in the prayer experience wherever two or three are gathered together in His name (Matthew 18:20).  In Acts chapter 12, a small group of believers who were praying in the home of Mary, was powerful enough to get God to send an angel to rescue Peter from prison and certain death. It is this power that is available to people of faith whether their prayer group is large or small.

       We should pray with a partner because it brings unity of mind, spirit, and purpose among believers. What could be more unifying than finding common ground with another believer, possessing the same mind and voicing the same concerns? Acts 2:1 describes that experience in this way, “On the day of Pentecost all the believers were meeting together in one place on one accord.” These people who were the recipients of the Holy Spirit on The Day of Pentecost were united in their prayers, and it brought power and results.

       Finally we should pray with a partner because partners can bless and cheer one another. In Luke 10, Jesus sent his disciples out two by two. He intended for them to bless and cheer one another. Ecclesiastes 4:9-12 describes the blessings that can come from a partnership with these words:

Two people are better off than one, for they can help each other succeed.  If one person falls, the other can reach out and help. But people who are alone when they fall are in real trouble. And on a cold night, two under the same blanket can gain warmth from each other. But how can one be warm alone?  A person standing alone can be attacked and defeated, but two can stand back-to-back and conquer. Three are even better, for a triple-braided cord is not easily broken.

What wonderful blessings are available in partnerships? Paul and Silas discovered these blessings. David and Johnathan discovered these blessings. Release God’s power by praying with a partner.

  


Disappointment of 1843-44

(excerpts from Life Sketches of Ellen G. White)

With carefulness and trembling we approached the time when our Saviour was expected to appear. With solemn earnestness we sought, as a people, to purify our lives, that we might be ready to meet Him at His coming. Meetings were still held at private houses in different parts of the city, with the best results. Believers were encouraged to work for their friends and relatives, and conversions were multiplying day by day. LS 54.1

Meetings in Beethoven Hall

Notwithstanding the opposition of ministers and churches, Beethoven Hall, in the city of Portland, was nightly crowded; especially was there a large congregation on Sundays. All classes flocked to these meetings. Rich and poor, high and low, ministers and laymen, were all, from various causes, anxious to hear for themselves the doctrine of the second advent. Many came who, finding no room to stand, went away disappointed. LS 54.2

The order of the meetings was simple. A short and pointed discourse was usually given, then liberty was granted for general exhortation. There was, as a rule, the most perfect stillness possible for so large a crowd. The Lord held the spirit of opposition in check while His servants explained the reasons of their faith. Sometimes the instrument was feeble, but the Spirit of God gave weight and power to His truth. The presence of the holy angels was felt in the assembly, and numbers were daily added to the little band of believers. LS 54.3

An Exhortation by Elder Brown

On one occasion, while Elder Stockman was preaching, Elder Brown, a Christian Baptist minister, whose name has been mentioned before in this narrative, was sitting in the desk listening to the sermon with intense interest. He became deeply moved, and suddenly his face grew pale as the dead, he reeled in his chair, and Elder Stockman caught him in his arms just as he was falling to the floor, and laid him on the sofa back of the desk, where he lay powerless until the discourse was finished. LS 55.1

He then arose, his face still pale, but shining with light from the Sun of Righteousness, and gave a very impressive testimony. He seemed to receive holy unction from above. He was usually slow of speech, with an earnest manner, entirely free from excitement. On this occasion his solemn, measured words carried with them a new power. LS 55.2

He related his experience with such simplicity and candor that many who had been greatly prejudiced were affected to tears. The Spirit of God was felt in his words and seen upon his countenance. With a holy exaltation he boldly declared that he had taken the word of God as his counselor; that his doubts had been swept away and his faith confirmed. With earnestness he invited his brother ministers, church members, sinners, and infidels to examine the Bible for themselves, and charged them to let no man turn them from the purpose of ascertaining what was the truth. LS 55.3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those who desired the prayers of the people of God were invited to rise. Hundreds responded to the call. The Holy Spirit rested upon the assembly. Heaven and earth seemed to approach each other. The meeting lasted until a late hour of the night. The power of the Lord was felt upon young, old, and middle-aged. LS 55.4

Elder Brown did not either then or afterward sever his connection with the Christian church, but he was looked upon with great respect by his people. LS 56.1

Joyous Expectancy

As we returned to our homes by various ways, a voice praising God would reach us from one direction, and as if in response, voices from another and still another quarter shouted, “Glory to God, the Lord reigneth!” Men sought their homes with praises upon their lips, and the glad sound rang out upon the still night air. No one who attended these meetings can ever forget those scenes of deepest interest. LS 56.2

Those who sincerely love Jesus can appreciate the feelings of those who watched with the most intense longing for the coming of their Saviour. The point of expectation was nearing. The time when we hoped to meet Him was close at hand. We approached this hour with a calm solemnity. The true believers rested in a sweet communion with God,—an earnest of the peace that was to be theirs in the bright hereafter. None who experienced this hope and trust can ever forget those precious hours of waiting. LS 56.3

Worldly business was for the most part laid aside for a few weeks. We carefully examined every thought and emotion of our hearts, as if upon our deathbeds, and in a few hours to close our eyes forever upon earthly scenes. There was no making of “ascension robes” for the great event; we felt the need of internal evidence that we were prepared to meet Christ, and our white robes were purity of soul, character cleansed from sin by the atoning blood of our Saviour. LS 56.4

Days of Perplexity

But the time of expectation passed. This was the first close test brought to bear upon those who believed and hoped that Jesus would come in the clouds of heaven. The disappointment of God’s waiting people was great. The scoffers were triumphant, and won the weak and cowardly to their ranks.Some who had appeared to possess true faith seemed to have been influenced only by fear; and now their courage returned with the passing of the time, and they boldly united with the scoffers, declaring that they had never been duped to really believe the doctrine of Miller, who was a mad fanatic.Others, naturally yielding or vacillating, quietly deserted the cause. LS 57.1

We were perplexed and disappointed, yet did not renounce our faith. Many still clung to the hope that Jesus would not long delay His coming; the word of the Lord was sure, it could not fail. We felt that we had done our duty, we had lived up to our precious faith; we were disappointed, but not discouraged.The signs of the times denoted that the end of all things was at hand; we must watch and hold ourselves in readiness for the coming of the Master at any time. We must wait with hope and trust, not neglecting the assembling of ourselves together for instruction, encouragement, and comfort, that our light might shine forth into the darkness of the world. LS 57.2


Does God answer only trivial prayers?

by Jonathan Paulien  / Dean, School of Religion, Loma Linda University

 

            The Bible tells us that our God is a God of love (John 3:16; 1 John 4:8, etc.). He is more willing to give good gifts to His “children” than even the most loving earthly father is (Matt 7:7-11). To put it in other words, God enjoys showering His beloved ones with little gifts. Just to say “I love you.” And I believe He loves to do this in some of the most personal and practical ways imaginable. Perhaps you’ve just lost hope of finding a parking spot in time to meet a critical appointment. You send up a desperate prayer and suddenly a space appears. A worried mother wonders where her boy is and sends up a quick prayer. Just then the phone rings and she discovers all is well. Or you survive a harrowing experience and discover later that several friends felt impressed to pray for you at exactly that time. Millions of believers around the world have experiences just like this every day. It is reasonable to suggest from this that God is real and that He loves to make His presence known to those who are open to it.

            But just now the skeptic in you is saying, Wait a minute! Are you trying to tell me that God manages the comings and goings in every parking lot around the world just in case one of His followers needs a spot at the last minute? If prayer is sometimes timed to remarkable events, what about all the times when people pray and “nothing” happens? What about all the real heartaches in this world that are met with silence? What about women who are raped and their cries for help go unheeded? What about men who contract terminal cancer in the prime of their life and feel as if their prayers go no higher than the ceiling? What about parents who pray for wayward children and go to their graves without a clear response from God?

            These objections have serious weight. Believers often fail to realize how trivial their experience of God’s presence may seem to others who have suffered deeply in this life. Our glib expressions of how God is working in our everyday lives can be like a knife in the heart to someone experiencing the absence of God. We must never forget that the absence of God in everyday experience can seem the norm to most people. It is even something Jesus experienced when He was on the cross (see Matt 27:46 and parallels). In spite of the deep intimacy with God that characterized every day of Jesus’ ministry, in the 24 hours before His death Jesus experienced increasing darkness to the point where He could no longer see the Father’s reconciling face. The withdrawal of a sense of God’s approving presence caused Jesus the deepest anguish (see Desire of Ages, page 753). To experience the silence of God, then, is no indication that a person is actually forsaken by God or is an incorrigible sinner. But at times like that it can feel as if God answers only trivial prayers.

            The story of Job may also be instructive here. Job’s experience makes it clear that there is no answer to most of the specific objections raised above, at least in this life. The tragedies in Job’s life were certainly unexplainable in earthly terms. They came from “nowhere” and made no sense to him. They had to do with complexities in the larger universe that Job never came to understand. The fascinating thing is that even when God came down in person to talk with Job about these issues (Job 38:1 - 41:34), He never mentions the real reason for Job’s suffering, a reason the reader of the story is allowed into (1:6-12; 2:1-7).

            From the book of Job we discern that there is a cosmic conflict in the universe that affects all that we do and all that we experience. God’s actions are sometimes limited by larger considerations in that conflict, things we may never understand until eternity. Perhaps God’s intervention in Job’s situation would have upset the whole space-time continuum of the universe in a way even quantum physicists could not understand. In other words, God cannot explain what we cannot understand. What we do understand is that larger divine interventions can change things in a way that causes collateral damage at some unspecified time in the future. Major actions of God have ripple effects in the lives of many people and their descendants over decades and even centuries. As those ripples play out in the course of history, they can have consequences that we cannot foresee but God in His infinite wisdom can. He may understand that the good we hope God will do in the present could cause even greater harm than His silence in answer to our prayers.

            There is an interesting biblical illustration of this. It is the story of Hezekiah as told in Isaiah 36-39. Hezekiah was one of the most faithful kings in the history of Judah (2 Kings 18:5-6; 2 Chr 31:20-21). He was faithful to God in his personal life and devotions. He expanded the borders of the country. He restored the temple that had fallen into ruins. He restored the priests and Levites to their regular services. He restored the feast days. He removed the rival altars around Jerusalem. He ordered the “high places” of rival worship all around the country to be destroyed. He destroyed the idols and images that the people had come to rely on. His prayers protected Jerusalem when it was surrounding by overwhelming Assyrian forces. It would be understandable, therefore, for people to think that Hezekiah’s premature death would be a tragic thing for the nation and a mistake for God to allow. I can almost see the ancient bloggers and pundits questioning God’s character in relation to this development. But it was not to be.

            When the time came for Hezekiah to die, he pleaded bitterly with God on the grounds of his lifelong faithfulness (Isa 38:1-3). God granted him an extension of 15 years (38:5), along with a major astronomical token of His presence (38:7-8-- how Hezekiah came to have this experience is not explained). Everyone seemed to have gotten what they wanted from God. Yet during those extra years two things happened that undid all the good that Hezekiah had done during his lifetime; the visit of the Babylonian envoys (39:1-8) and the birth of his son, who became the evil king Manasseh (2 Kings 21:1-9). In the context of the cosmic conflict between God and Satan major interventions in people’s lives are very complicated. The ramifications are usually way beyond our understanding.

            Having said this, I still want to argue that a believer’s experience in a parking lot is not necessarily imaginary. I cannot explain the timing and the effort involved in God’s actions. But I do believe that God would answer every prayer in a positive manner if pleasing us were the only consideration. If finding someone a parking space or timing a phone call will not upset the space-time continuum of the universe, why wouldn’t a loving God intervene? If a woman makes a full commitment to Jesus just as a rain shower happens to be passing, why wouldn’t God arrange that if the stakes were low enough? I guess what I am saying is that the lower the ultimate stakes, the lower the potential consequences of any particular divine intervention, the more likely that a loving God can use the circumstances of life as a token of his love. We serve a God who delights to please His children whenever so doing would not cause harm to anyone.

            Having said that, those of us who have experienced this kind of intimacy from God need to be careful when and how we share such experiences with others. Our well-intentioned testimony can do harm even when God’s gift did not. While we should rightly acknowledge the small tokens of God’s favor in our lives and rejoice over them in the right circumstances, we need to also be aware of how often our testimonies cause pain.